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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숨쉬는 책장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 영화 <더 콘서트>를 보고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Красота спасет мир

                                                                              - 도스토예프스키, '백치' 중에서

     아름다움이 과연 우리에게 구원이 될 수 있을까? 꿈을 잃고 의지를 잃고 30년을 헤매인 사람들에게, 권력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짓밟힌채로 음악을 잃고 친구를 잃고 가족마저 잃어버린 낙오자들에게 과연 예술이 구원이 되어줄 수 있을까?  30년전의 아름다움 따위가 당장 오늘의 배고픔을 해결해줄 수 있을까? 권력에 밟히고 세상에 치인 힘없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움' 따위의 관념적인 언어가 과연 구원이 되어줄 수 있을까? 영화 <더 콘서트 The Concert>는 러시아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이 수사를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통해서 실재화된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볼쇼이 오케스트라의 명지휘자였던 안드레이 필리포프는 유태인 단원들을 오케스트라에서 내쫒으라는 브레즈네프로 대표되는 러시아 권력의 요구에 저항했다. 거창한 인권의식이 있어서도 영웅심 때문도 아니었다. 극중에서 안드레이 스스로 고백했던 것처럼 음악에 대한 이기적인 집착, 유태인 단원들이 있어야만 차이코프스키를 제대로 연주해 낼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선택으로 인해 권력은 그와 그의 단원들을 짓밟았다. 안드레이는 오케스트라에 대한 접근을 차단당한채 30년의 세월을 볼쇼이 극장의 청소부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낡은 구급차 운전수로 살아가는 첼리스트 사샤나 집시가 되어 떠도는 퍼스트 바이올린 주자, 그리고 목숨처럼 사랑한 음악을 빼앗긴채로 택시기사로 재래시장의 과일장수로 막일꾼으로 이런 저런 삶의 모습들로 근근히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단원들에게 희망이란 그저 돈 몇푼이었다. 마피아 재벌의 결혼식이나 이제는 공허한 구호만 남은 공산당의 시위현장에 인력동원되어 받는 일당을 모아서 시골에 땅 조금 사서 농사지으면 몫돈 나길 일 없게 되는 것, 이것이 그들의 어둡고 칙칙한 삶에 비춰질 유일한 햇살이자 구원이었다. 자그만치 30년이다. 그들이 음악과 함께 했을 시간보다 더 길었을 시간동안 그들은 음악과 격리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음악은 막막하기만한 삶을 지탱시키는 유일한 힘이었다. 벽장 속 깊숙이에 음악 CD를 감춰두고서, 악기를 연주할 수 없는 대신 입으로 악기소리를 대신해가면서 음악에 대한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갈하며 살았다. 그것이 아름다웠던 그들의 과거를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그 힘으로 웃음을 잃지 않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이 그들을 삶의 구석까지 내몬 권력에 대한 가장 소극적인 저항이었다. 음악을 놓지 않음으로써 그들에게서 음악을 빼앗은 권력에게 저항하는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콘서트 무대에 쳐들어와서는 지휘봉을 꺽어버렸던 그들의 전 매니저 공산주의자 이반에게까지 적극적인 저항을 보이지 않는다. 화를 내고 울부짓다가도 이반 역시도 그저 그보다 더 위에 있는 권력의 명령에 의해서 그랬을 뿐이지라고 이해해버리는 아름다울 만치 순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가슴 속에 안드레이가 다시 불을 지펴버린다. 꺼질듯 꺼지지 않고 30년을 이어온 불씨를 다시 살려내서는 활활 지펴버린다. 파리의 한 극장에서 건너온 볼쇼이 오케스트라 초대장을 훔쳐내서는 자신과 단원들을 대리고 파리로 향하는 안드레이, 한없이 순하기만한 그가 이토록 무모한 사기극에 뛰어드는 이유는 오직 하나 음악에 대한 갈망, 가슴 속에서 30년을 떠나지 않고 잇는 차이코프스키라는 귀신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에 의해 역시 그 집착의 세계로 빠져들었던 레아 때문이었다. 권력에 의해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추위와 탈진으로 죽어가면서도, 악기도 없고 암기에 의해 손가락으로 마치 바이올린 현을 켜듯 짚어가며 차이코프스키를 연주했던 레아에 대한 죄의식 때문이었다. 30년전 프랑스로 몰래 탈출시켰던 레아의 딸 안나 마리 자케를 다시 만나 그녀와 바이올린 협주를 하게 된다면, 30년전에 잠깐 손에 잡히는 듯 했던, 그러나 권력에 의해 무참히 중단됨으로써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린 차이코프스키를 다시 만날 수 있을것 같았다.

     영화는 시종일관 코미디 장르를 벗어나지 않으려 하면서도 또 한편 전혀 친절하지도 않다. 숨겨진 이야기들을 쉽사리 드러내주지 않는다. 관객들에게 불친절하기로 유명한 누벨바그의 산실 프랑스 영화답게 이야기 전개도, 캐릭터들의 감정선도 별다른 상황 설명 없이 툭툭 튀어버린다. 그저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콘서트에만 미쳐서 오케스트라를 준비하는 안드레이처럼 영화는 모든 설명을 생략한채 그저 오케스트라가 준비되고 만들어지고 파리로 향하는 일들만 분주하게 보여줄 뿐이다. 안드레이가 오케스트라를 만들어가는 분주한 모습 속에서 간혹 돈으로 모든걸 해결하려는 러시아 재벌들의 모습이나 허세만 가득한채 뒤로는 주판알만 튕기도 있는 프랑스 예술 비지니스의 뒷모습을 비웃어줄 뿐이다.

    그리고 영화는 후반 20여분을 이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려주는데 소비해버린다. 모든 숨겨진 이야기의 비밀이라거나 그후의 뒷 이야기들은 모두 이 콘서트 속에 버무려버린다. 시베리아에서 추위에 떨면서도 손가락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레아의 모습과 극장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안나의 모습이 매치되는 순간, 영화는 앞서 말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수사 '아름다운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는 말이 진실임을 보여준다. 그 순간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주는 숭고함과 아름다움은 빼앗겨버린 연주자들의 30년 세월을 넘어서 시베리아 벌판에서 얼어 움직이기도 힘든 손가락으로 바이올린을 켜는 레아의 추워 발개진 뺨을 만난다. 그리고 그녀의 딸 안나가 30년 세월 뒤에 레아가 해석했던 차이코프스키를 연주함으로써 시베리아에서 죽어간 레아가 되살아난다. 음악이, 그 음악의 아름다움이 레아를,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을 , 안드레이를, 그리고 부모없이 외롭게 자랐던 안나를 구원한 것이다.

    실제적인 가난, 좌절과 만난 사람들에게 음악이 구원이 될 수 있을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파리까지 가는 차비 마련에 허덕이고, 파리에서도 일당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중국제 휴대폰을 다량으로 가져와서 파느라고 콘서트 리허설조차 하지 못한다. 여전히 그들에게 구원은 지갑에 꼳힌 지폐 몇장일 뿐이다. 음악이 그들의 지닌 삶의 무게들을, 얇은 지갑을 채워줄 수 있을리는 만무하다. 그들에게 어쩌면 음악은 관념일 뿐이고, 차이코프스키에 미쳐있는 안드레이는 30년전의 과거가 주는 향수에 빠져사는 미치광이 알콜중독자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음악은 그런 이들을 구원해낸다. <레아를 위해서>라는 문자 하나에 하던 일을 멈추고 모여드는 사람들, 30년전에 아주 잠깐 맛보았던 그 음악의 숭고한 아름다움 환희를 다시 느껴보기 위해서, 그들을 대신해 희생양으로 스러져간 레아의 비극적인 죽음을 차이코프스키를 다시 연주함으로 살려내기 위해서 그들은 다시 악기를 손에 쥔다. 리허설 한번 못해봤기에 삐걱거릴 수 밖에 없지만, 30년전 그날처럼 바이올린 독주의 리드에 따라 그들의 음악은 춤을 추기 시작했고, 그 춤은 마치 한 판 살풀이처럼 지난 30년 응어리진 그들의 한과 레아와 안나의 가정이 겪은 비극의 상처들을 모두 씻어내버렸다. 그 순간만큼은 핸드폰을 팔아 가방에 모아둔 지폐다발 따위도, 그들에게 거금을 후원하는 러시아 재벌의 존재도 중요치 않다. 그저 그들의 삶을 끝내 구원해내는 아름다움만이 그 눈물로 반짝거리는 눈망울에 가득할 뿐이다. 결국 <아름다움>이 구원해 낸 것은, 당장의 먹을 것에 대한 걱정이 아닌 그보다 더 근원적인 삶의 문제, 그들이 그렇게 먹을 것을 걱정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만든 권력이 그들에게서 앗아간 본질, 바로 음악의 회복이었던 것이다. <아름다움>은 끝내 관념의 틀을 벗어버리고 그들의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이 되었다.

    그렇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처럼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해 낼> 수 있다면, 그 지독히도 관념적인 언어가 실재적인 세상에 빛이 되어줄 수 있다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땅, 여전히 가진 자들에 의해 빼앗기는 자들이 존재하고, 꿈도, 아름다움도 잃어버린채 하루 하루 근근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이 <아름다움>이 구원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일까?

    마음이 가난한 이들에게, 슬퍼하며 애통하는 이들에게,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에게 행복을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 역시 지독하리만치 관념적이다. 당장에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압제자에게 아내를 딸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너희에게 하늘나라가 있다. 행복해라'라는 말이 얼마나 공허한 말이었을까? 사람들은 그저 예수와 제자들이 건내주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에만 관심을 둘 뿐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구원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도 없는하늘나라가 아니라 당장 먹을 떡 한덩이었을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예수는 "하늘나라"를 약속한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결국 사람들이 고통받는 이유는, 지금 가지지 못한 떡 한덩이 때문이 아니라, 그 떡 한덩이를 갖지 못하게 만든 더 근본적인 문제인 '나라'에 있었다. 빼앗긴 나라라는 근본적 문제가 던져준 가난이었고 압제였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그들 안에 잃어버린 <하나님 나라>의 상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는 떡덩이보다 더 본질적인 구원인 <하늘 나라>를 약속한 것이다. <너희 배고프고 고통받는 이들아, 하늘 나라가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아름다움>이 구원이 될 때, 관념적으로 들리는 <하늘나라>가 구원이 될 때, 비로소 슬퍼하며 애통하던 사람들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행복>이 가져다주는 구원이야 말로 30년의 시간이 주는 간극을 넘어서, 시베리아에서 죽어간 어미와 파리에서 부모를 모른채 자란 딸의 간극을 넘어서, 각자의 삶의 문제와 생각이 전혀 달랐던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모든 간극을 넘어서 모두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