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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기꾼의 성서 이야기

요나 vs 하나님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글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 요나 3: 10 ~ 4: 3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단다. 
자비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신 분이시란다. 
이 얼마나 은혜롭고 감미로우며 아름다운 기도란 말인가? 

그런데 그 앞뒤 문맥을 보아하니 이건 좀 이상하다.
3장 10절에서 니느웨가 죄에서 돌이킨 것을 보신 하나님이, 
니느웨를 벌하지 않으시기로 하였다.
4장 1절에서 이를 본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했다 한다. 
그래서 4장 2절의 저 기도를 했다.
그러고는 4장 3절에서 이젠 차라리 죽여달라고 생때를 쓰고 있다.
그렇다면 주님이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다는 저 요나의 기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오래전에 모 드라마에서 고두심이 히트시켰던 말이 하나 있다.
"잘났어~ 정말~"
이 말이 정말 상대방이 잘났다고 칭찬해주는 말이었던가?
아니다. 이건 반어법이다.
속된 세상말로 "네 팔뚝 굻다"와 동의어로 쓰이는 말이다.

그렇다. 지금 요나는 반어법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비꼬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담대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1장 3절을 보면, 처음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로 갈 것을 말씀하셨을때..
하나님의 낯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였다고 나와 있다..
세상에.. 어디를 간다고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스는 하나님이 안계시는 뭐.. 치외법권지역 같은 곳이란 말인가?

시편 139편 7절에서 10절을 보면, 다윗은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그렇다. 지구 끝까지 어느 곳으로 도망치더라도 
하나님의 낯을 피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선지자 요나가 다윗의 시편을 모르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을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 하였다.
참으로 담대한 사람이다.

이리도 담대한 사람이니 하나님 앞에서 마구 비꼬는 건 못할쏘냐? 

그런데 하나님의 반응이 참으로 놀랍다.
4장 4절에서 하나님은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라고 딱 한마디만 하신다.
사람의 성질대로라면 번개라도 내려 태워 죽일것 같은데 
딱 한마디 하시고서는
4장 5절에서 니느웨 성 동편에 앉아서, 
하나님이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니느웨 성이 멸망할 것을 기대하며 구경하려고 기다리는 요나에게
4장 6절에서 박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셔서 그늘이 지게 하셨다.
참으로 대단한 인내심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물론, 하나님은 그리 무조건 오냐 오냐 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4장 7절에서, 벌레를 준비하시더니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씹게 만드셨다. 
그뿐이랴?
4장 8절에서는 해가 뜰 때에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셔서 요나의 머리에 죄게 하셨다.
참으로 짓궂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 짓궂은 하나님 앞에 담대하면서 한편으론 단순한 요나의 행동을 보라. 

4장 8절에서 요나는 
그 뜨거운 동풍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죽기를 간구한다.
4장 9절에서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 박넝쿨로 네가 성내는게 어찌 합당하냐고 따지시자 요나의 대답이 가관이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막말도.. 이정도의 막말이 있을까?
요나는 참으로 단순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니느웨성을 멸망시킨다 하셨으면
반드시 멸망시키셔야 하는거라고 생각했고,
또 죽고 싶다고 말하였지만 
그래도 그늘을 만드는 박넝쿨 하나로 기분 좋다가 벌레가 그 박넝쿨을 씹어버리자
다시 죽여달라고 탄식한다. 

게다가 참으로 담대한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서 갈때까지 간다 자기가 성내다 죽을지라도 자기가 옳다고 우긴다.

반면에 하나님은 짓궂으시면서, 인내하시는 분이다.
박넝쿨 하나로 요나를 웃게 만들었다 다시 울리신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 박박 대드는 요나를 끝까지 인내하신다.

4장 10절에서 하나님은 
너는 박넝쿨 하나도 아까워 하면서 
12만명이 살고 있고, 육축도 많이 있는 니느웨성은 왜 아끼지 않느냐며
요나에게 자신의 뜻을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주신다. 

단순하고 담대한 요나와 짓궂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한판 승부는
하나님의 K.O. 승으로 마무리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것은 이것이다.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것의 차이이다.
우리는 요나의 단순함과 담대함을 욕할 수 있다.

그러나 
요나가 니느웨 성이 멸망할 것을 바란 것은 사실 
당시대 상황으로 보면 그리 욕먹을 행동은 아니었다.
유대인 요나에게 앗수르는 원수였다. 원수의 멸망을 바라는 심정은 단순했다.
게다가 하나님이 그 멸망을 약속하셨지 않은가?
다시스로 도망하려던 자신을 끝까지 붙드셔서 억지로 니느웨로 끌어다 놓으시고
그 멸망을 예언케하셨다.

그런데 요나의 뒷통수를 치신거다. 니느웨를 멸망치 않으신거다. 
요나의 단순함과 담대함은, 그리 과장되거나 심한 건 아니었다.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요나의 모습과 비교해서 무엇이 다른가?
여자친구와의 이성교제가 잘 안된다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때로는 자신과 가족들의 건강이 사업이 잘 안된다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아무리 내가 생각하기엔 이쪽이 옳고 또 좋아보이는데
그래서 며칠이고 밤새워 기도하고 또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반대쪽으로 가라하시면 도저히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없다.

요나의 단순함과 담대함은 사실 우리 모두의 성정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를 끝까지 인내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요나가 하나님을 비꼬았던 그 말대로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애가 크신 분이시다.

이런 단순하고 담대한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다리시며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밝히 보여주시는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을 바라보자. 그런 하나님의 시각을 견지하자. 
사람의 명철이 갖는 한계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자.

덧붙여 생각해보건데
이 요나서의 저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해보면 재미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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