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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숨쉬는 책장

월드컵과의 질긴 악연에 대하여


    4년에 한번, 온 국민이 모두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시간이 있다. 축구공 하나에 모두가 열광하고 모두가 탄식하게 만드는 전 세계가 축구공 하나로 즐거운 축제, 바로 월드컵이다. 딱히 스포츠를 즐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축구문화사에 관심이 많은 관계로 주요 축구 리그 소식들에 목말라하고 국가대표들이 맞붙는 A 매치때마다 "대한민국"을 목청껏 외치는 사람중 하나로서 이 월드컵이 참으로 반갑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월드컵과 나는 인연이 좋지 못하다.

    축구에 관심이 별로 없던 어린시절이었던지라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월드컵은 1994년 미국 월드컵이었다. 유난히도 뜨거웠던 그 여름, 페트병에 차가운 물을 담아서 머리 위에서 계속 쏟아부으면서 공부를 해도 머리 속에 아무 것도 들어가지 않던 그 때, 나는 고3의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수학능력시험을 코 앞에 두고 있는 고3이라고 해서 월드컵이 즐겁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유롭지 못하기에 더 갈급하고, 더 궁금해지는 고3의 월드컵이었다. 대입 공부로 정신이 없던 그 때, 한국과 독일이 맞붙는 경기가 열렸던 것은 어느날 오전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이 학력평가 모의고사를 보는 날이었다. 시험 걱정에 월드컵에 대한 궁금함에 모두 지쳐버렸던 그 날, 교장선생님이 뜻밖의 결정을 내리셨다. 고3 모의고사를 두시간 정도 전체 뒤로 미루고 월드컵 독일전을 시청할 수 있게 배려해 준 것이다. 각 반에 놓여있던 커다란 TV 모니터를 켜고 책상을 한데 모아두고는 책상에 적당히 걸쳐 앉아 축구경기를 관람했다. 어설프게나마 볼펜으로 얼굴이나 손목에 태극기를 그려 넣기도 하고, 좋아하는 축구선수의 이름을 적어 놓기도 했다. 축구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던 나 역시 그 열기에 자연스레 동참하게 되었다. 어떤 친구가 손목에 '필승 16강' 이라고 적혀 있는걸 보면서 왜 우승이 아니라 고작 16강 가지고 목을 매냐고 핀잔을 했을 만큼 축구에 무지했던 나에게도 3대0으로 지던 경기를 3:2까지 몰아붙이는 한국 국가대표를 보면서 축구의 재미에 흠뻑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축구의 축자도 모르던 내가 전세계인의 취미생활에 동참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3에게, 그것도 유난히 더웠던 그 여름에 더이상의 월드컵을 즐길 여유 따위는 없었다.

    대학에 진학하고 조금은 삶의 여유가 생기면서 스포츠라는걸 즐길줄 알게 되었다. 우리 대학이 뛰고 있는 대학 야구나 대학 축구 소식도 궁금하게 되고, 황선홍이니 홍명보이니 하는 스타플레이어들에게 관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렇게 4년이 흐르고 1998년 여름이 다가왔을 때, 나는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는 신병 교육대에 입소했다. 남들처럼 3년동안 군생활 하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 출퇴근하는 공익이었지만 한달동안은 신병교육대에 들어가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내가 입소했던 날이 6월 14일, 그리고 7월 15일인가에 퇴소했다. 바로 월드컵 개막할 때 들어가서 결승전까지 끝나고 나서야 퇴소했다는 이야기다. 어느날 밤 자다가 강제로 깨우는 조교들의 아우성에 연병장으로 뛰쳐나가 밤새 얼차려를 받으면서, 왜 조교들이 저렇게 화가 나 있을까 궁금해 하다가 나중에야 한국 대표팀이 네덜란드에게 5:0으로 패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결국 98년 프랑스 월드컵은 나에게 얼차려의 기억만을 남기고 지나가 버렸다.

                                                                                    
    나름 공익으로 몇년간 출퇴근 잘 한 뒤에, 대학에 복학했다. 고전소설 강의를 위해 발제를 준비하며 접하게된 PC게임에 푹 빠져버렸던 내게 유난히 재미있게 다가온 것이 축구 게임이었다. 게임상에서지만, 축구팀을 직접 감독하며 경기해보는 것은 묘한 재미가 있었다. 게임을 통해서 조금씩 해외 스타 플레이어들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로이 킨이나 호나우도, 로베르토 카를로스 같은 선수들의 이름을 들으면서 입을 벌리던 평범한 축구팬의 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4년이 흘러 2002년이 되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도 잊을 수 없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온 거리를 붉게 물드이고 "대한민국" 이라는 함성과 박수 소리로 드높았던 그 여름에, 나는 한국에 없었다. 카자흐스탄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그곳의 대학생들에게 한국어 교육을 하고 있었다. 그 여름엔 마침 선교센터가 새로 이주해서 한참 내부 공사중이었기에, 한국과 폴란드의 월드컵 첫 경기가 열리던 때, 나와 선교팀원들은 모두 센터 공사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침 9시에 출근하면 두시간 카작어 수업 말고는 밤 11시 넘어까지 쉬는 시간이라고는 점심시간 20분 밖에 없이 하루종일 공사에 매달렸던 시기였다. 선교사였기에 공사도 선교라는 생각하면 되는데 그래도 월드컵은 정말 보고 싶었다. 우리는 카자흐스탄에 놀러간 것이 아니라 선교하러 갔기에, 축구경기보다는 센터 공사와 선교사역이 더욱 중요하다는 선교팀 대표 선교사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밖에 없었다. 모두들 입이 댓발은 나왔었지만,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쉴새없이 공사에 매달리던 바쁜 나날이라 다들 어쩔수 없이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너무나 궁금했다. 벽에서 페인트칠을 벗겨내면서도, 벽돌을 나르면서도 머리 속은 온통 월드컵 생각 뿐이었다.


    그런데 다음날에야 속도가 한참 늦은 인터넷을 통해서야 경기 결과를 확인한 우리 선교팀에게 들려온 놀라운 소식이 있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모두 시내 모처에 모여서 월드컵을 관람했단다. 이럴 수는 없다며, 우리에게도 축구를 보여달라고 대표 선교사님에게 떼를 쓴 결과 2차전인 미국 전에는 우리도 잠깐 짬을 내어 축구경기를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본래 미국 선교사들과 함께 보려던 것이 불발되고 우리 팀끼리 따로 시내 터키 식당에서 터키 방송에서 보여주던 한국과 미국의 경기를 볼 수 있었다. 터키어 뿐이었지만, 그래서 골을 넣은후 오노를 노리고 하던 골 세레머니가 어떤 의미인지도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경기가 끝나고 다시 센터로 돌아가 센터공사를 해야 했지만 모두가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후의 포르투칼전, 이탈리아전, 스페인전, 그리고 독일전까지 그런 식으로 관람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그 붉은 열기는 느껴볼 수 없었다. '오 필승 코리아'라는 노래가 있다고 이야기만 들었지 어떤 가사에 어떤 음계인지도 몰랐다. 월드컵 직후 여름 단기선교팀이 카자흐스탄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통역으로, 가이드로, 코디네이터로 그들을 섬기기 위해서 분주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단기팀을 맞이하기 위해 나갔던 공항에서 온통 Be the Reds 빨간 티셔츠를 입고 비행기에서 내리는 한국사람들을 보면서 왜 저런 이상한 티셔츠를 단기팀 단체 티셔츠로 맞춰 온걸까 의아해 했다. 그만큼 한국의 월드컵 열기에 무지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두고 두고 아쉬운 2002년 월드컵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또 변함없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이젠 2002년의 감동 덕에 완전히 축구에 매료되어버렸다. 2002년 이후로 해외 진출이 잦아진 우리 선수들 덕에 해외리그에 눈돌리게 되었다. 해외에 좋아하는 프로 축구팀도 생겼다. 좋아하는 선수도 생겼다. 조금씩 축구를 알아가면서 유럽에서 축구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알게 되면서, 축구 문화사에 관심이 생겼다. 축구 역사에 관련된 자료들을 뒤져가면서 공부도 해봤다. 본래 역사와 문화를 좋아하는 탓에 유럽의 근대사와 현대사가 맞물려 있는 축구 역사는 내게 많은 즐거움을 주었다. 마침 소위 폐인 양성 게임이라고 이름 높은 Football Manager 게임을 접하게 되면서는 완전히 그 세계에 푹 빠져 버렸다.

    그렇게 다시 4년이 흐르고 2006년이 되었다. 그런데 이 2006년 독일 월드컵 역시 내게 그리 좋은 인연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토고와의 첫 경기가 열리던 날 밤, 나는 누나네 치킨 가게 주방에서 통닭을 굽고 있었다. 월드컵 기간이면 대박이 나는 치킨장사 덕에 일손이 딸린 관계로 도울 수 밖에 없었다. 아예 월드컵을 안 보고 안 듣고 지나가면 모를까, 온통 거리에는 붉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녔고, 홀에서는 손님들 모두 TV 화면에 집중하며 응원하는 소리가 고스란히 주방까지 들리고 있었다. 주방에서 뜨거운 열기를 참아가며 통닭을 구우면서 홀에서 TV로 축구를 보는 손님들이 내지르는 탄식과 함성을 들으며 눈물을 삼켰다. 다행히 2차전과 3차전은 새벽 이른 시간이었던 관계로 통닭을 구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 무렵 미국 대학원에 입학허가를 받아놓고 한참 비자서류 준비 중이었던 때였다. 스위스와의 마지막 경기가 있던 전날, 미국 대사관에서 두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비자인터뷰를 받았고, 너무나 터무니 없는 이유로 비자가 거부되어버렸다. 황당함과 기막힘 속에서 답답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고 밤을 새운 뒤에 본 월드컵이 머리 속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더구나 너무나 아쉽게 져버린 경기였으니 쓰린 속을 더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또 4년이 흘렀다. 눈물을 머금고 유학을 포기하고 국내 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다시 그 대학원을 졸업했다. 졸업 이후 다시금 유학을 준비했다가 이번엔 또 장학금 문제로 다시 한번 더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맞이한채로  또 한번의 월드컵을 맞이했다. 이런 상황이니 이번 월드컵 역시 편한 마음으로 볼 수 는 없었지만, 그래도 지난 몇번의 월드컵보다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다. 첫경기 그리스전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았고, 2차전 아르헨티나전은 친구 박진무군의 집에서 지인들과 함께 모여 응원했다. 3차전 나이지리아전은 새벽인 관계로 밤을 홀딱 새운 후 집에서 볼 수 있었다. 경기 직후에 밤샘한 졸려운 눈을 비비며 가족들 운전기사 노릇을 해야 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편안하게 즐기는 월드컵이 되었다. 더구나 사상 처음으로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룬 월드컵이니 어찌 아니 기쁠까? 이젠 손목에 16강에 대한 소원을 적어넣던 친구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고, 5:0으로 지고 열받아 우리를 굴리던 신병교육대 조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승패와 상관없이 축구 그 자체로 충분히 즐거운 월드컵, 8강도 좋고 4강도 좋지만, 남은 우루과이전을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그런 월드컵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