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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숨쉬는 책장

익숙할수록 쉽게 잊히는 것들

1. 
내가 졸업한 대학 안에 호수가 하나 있었습니다. 일감호라는 이름의 나름 꽤 넓은 호수입니다. 어느 정도 넓으냐면 호수에 얼음이 얼고 눈이 내려 하얗게 덮여 버리면 처음 보는 사람은 왠 운동장이 이리 넓으냐고 오해할 정도였지요.

그런데 막상 그 대학 재학생들은 가끔씩 이 일감호를 인식하지 못할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바쁜 일상이 문제입니다. 학교 생활에 찌들어 살다보면 학교에 일감호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워낙 넓은 학교인지라 강의실과 강의실이 참 넓습니다. 강의와 강의 사이 짧은 10분만에 옮겨다니기엔 벅찬 거리지요. 이 강의실에서 저 강의실로 정신 없이 뛰어다니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보면 그 곳에 잔잔한 호수와 그 위를 노니는 오리 때가 눈에 들어오지요.  그렇게 눈에 들어온 호수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익숙한 것일 수록 더 쉽게 잊히는구나 하고요.


2. 
내방 장롱 속 한 구석에 돔브라가 놓여 있습니다. 돔브라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전통 현악기입니다. 조그마한 기타를 상상하시면 되는데 단 두 줄의 현을 튕기며 연주하는 악기이지요.  

몇해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반년 정도 선교활동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선교 활동을 마치고 돌아올때 한국의 지인들을 위한 이런 저런 선물들 사다가 문득 왜 내 자신을 위한 선물은 없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내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었습니다. 비록 연주할 줄도 모르는 악기지만 큰 돈을 주고 이 돔브라를 구입했습니다.

그 악기를 들고서 한국에 왔습니다. 인천공항에 서울까지 오는 길에 만나는 사람마다 그 악기만 쳐다보더군요. 신기해하며 쳐다보는 사람들 눈초리를 만끽하면서 왠지 우쭐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 돔브라가 지금은 내 방 장롱 속 잡동사니와 함께 박혀 있습니다. 장롱을 열때마다 하얗게 먼지가 쌓인 악기를 쳐다보며 생각합니다.

소중한 것일 수록 더 쉽게 잊히는구나 하고요.


3. 
얼마 전까지 우리 집엔 참 텔레비전이 많았습니다. 거실에 있는 커다란 텔레비전뿐 아니라 각 방마다 가족 수대로 텔리비전이 있을 지경이었습니다. 최소한 채널때문에 가족끼리 다툴 일은 없었지요. 텔레비전이 그렇게 많았던건 우리 가족이 특별히 돈이 많고 사치를 해서가 아닙니다. 누나가 대학시절 따로 자취를 했던 이유입니다. 야기꾼 역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자취를 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고등학교 정문 앞에 자취방을 마련하면서 텔레비전을 구입했습니다. 교육방송을 듣고 공부해야 한다는 핑계로 사들였던 텔레비전으로 공부는 안하고 드라마나 연예 프로를 더 보았던 것 같습니다. 힘들었던 고등학교 시절 그 텔레비전을 보며 외로움을 달랬습니다. 그 텔레비전과 함께 십여년을 보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할 무렵까지 함께했지요. 오랜 시간 함께한 텔레비전이였지만 10년을 넘어가면서 조금씩 화면이 불안해지더니 대학을 졸업하기 얼마전 화면이 완전히 나가버리고 그 수명을 다해버렸습니다.

수리를 할 수도 없는 낡은 텔레비전을 동네를 돌아다니던 고물상 아저씨에게 팔아 넘겼습니다. 고철도 쓸래야 쓸 수 없다고, 이런건 돈 주고 사는게 아니라 돈 받고 가저가야 한다고 투덜거리는 아저씨에게 천원짜리 몇장 받고 넘겨버렸습니다.

이제 집에서 내 방에만 텔레비전이 없습니다. 텔레비전을 볼 시간도 없을 뿐더러 보고 싶은 방송이 있으면 인터넷으로 다운받아보면 되기에, 굳이 텔레비전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십여년을 익숙하게 보냈던  그 텔레비전의 부재가 아무렇지 않은 나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오래된 것일 수록 더 쉽게 잊히는구나 하고요.


4. 
물건을 소중하게 보관하는 성격이 아닌데도 텔레비전 보다 더 오래 쓴 물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낡은 책상입니다. 이 책상과 언제부터 함께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무렵에 찍은 사진을 보면 이 책상 앞에서 바닥에 발이 닫지도 않는 의자에 앉아 찍은 사진이 있는걸 보면 20년은 족히 넘었습니다. 이 책상에 앉으면 바닥에 발이 닫지 않고, 손이 책꽂이에 닫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낡아지더군요. 

이 책상 앞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수능시험을 망치고 돌아온 밤에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던 것도 이 책상이었습니다. 좋아하던 자매에게 딱지 맞고 한참을 얼굴을 묻고 있던 것도 이 책상이었습니다. 중학교때 못질 몇번 해주었고 고등학교때 내 손으로 페인트칠도 해주고 하면서 20년을 나름대로 튼튼하게 오래 버텨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상과도 이별하는 날이 다가오더군요.  몇 해 전 자취방을 옮기면서 이 책상이 애물단지가 되어버렸습니다. 더 좁은 자취방으로 이사하게 되니 넓다란 책상을 둘 곳이 없었거든요. 결국 안타까운 마음을 누르고 이 책상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동사무소에 들러 대형 쓰레기 신고를 하고 끊어온 딱지를 책상 위에 붙여서 집 앞에 내다 놓았습니다. 반나절도 채 지나기 전에 사람들이 와서 가져가 버리더군요. 차에 실려 떠나가는 책상을 바라보며 마치 책상과 함께 했던 20여년의 세월과 작별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많은 추억을 공유한 친구를 떠나보내는 듯 했습니다.

이제 그 책상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좋은 책상 앞에서 이 글을 씁니다. 편한 의자에 앉아서 너무 깨끗해서 매끈하기만 한 책상 위에 앉아서 아무렇지 않게 낡은 책상을 추억하는 나를 보며 생각합니다.

친구같은 존재도 쉽게 잊히는구나 하고요.

5. 
습관이란게 참 무서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습관을 무너트리기가 오히려 더 쉬운 것 같습니다.  익숙할 수로 쉽게 잊힌다는 사실을 알게된 이후로 쉽게 습관을 들인다는 것에 망설여지곤 합니다. 오랫동안 익숙하던 것들로부터 어느날 갑자기 멀어져 버렸는데도 또 금새 아무렇지 않게 그 부재의 상황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도 사랑도 내게 그러지 않을까 싶어 두렵습니다. 쉽게 잊히고  쉽게 익숙해져가는 것은 참 두려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