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야기가 숨쉬는 책장

사랑이라는 이름의 욕망

1. 악어

김기덕을 참 좋아합니다. 그의 영화 속에 표현된 숱한 욕망의 군상들을 참 좋아합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배우 조재현과 함께한 작품들은 더욱 더 좋습니다. 김기덕이 욕망을 가장 잘 표현해내는 감독이라면 조재현은 욕망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배우니까요. 김기덕-조재현 콤비를 처음 만난 것은 영화 [악어]였습니다.
[악어]는 김기덕 감독의 데뷔 작품입니다. 영화 전반을 흐르고 있는 김기덕 특유의 잔인함이나 음흉함도 놀라웠지만 라스트 신에서 주인공 조재현이 보여준 연기력 역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한강 물 속에 가라 앉아 있던 벤치에 여주인공과 함께 앉아서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 그의 팔목에서 솟아 오르던 핏물, 그리고 조재현의 두려움 가득한 표정......


극 중에서 조재현은 한강 다리 밑에서 노숙을 하면서 한강에서 자살하는 이들의 시체를 숨겼다가 가족들에게 돈을 받고 장소를 알려주는 속칭 악어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어느날 그는 한강에서 자살하려고 뛰어내린 어느 여인을 구해내었습니다. 평소처럼 시체를 숨겨두었다가 돈을 받고 인도하려고 했지만 여자를 보는 순간 성적인 욕망을 느끼고 그녀를 구해내어 가둬둔채 자신의 성적 도구로 이용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녀의 이야기를 하나 하나 알게 되면서 악어는 점점 그녀에게 빠져들게 됩니다. 그녀는 본래 약혼자가 있는 여자였지만, 약혼자의 사주를 받은 깡패들에 의해 윤간을 당하고 그 충격으로 자살을 시도했던겁니다. 그녀에 대한 연민이 사랑으로 바뀌고 더 이상 그녀를 성적으로 이용하지 않게 되고, 또 아직까지 약혼자의 배신을 깨닫고지 못하는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주며 도와주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약혼자의 배신을 깨달은 그녀는 결국 다시한번 자살을 택하게 되지요. 다시 한강 물 속에서 자살하려는 여주인공을 구하기 위해 악어도 뒤따라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그녀가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 사랑하는 그녀와 같이 죽음을 맞이하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녀의 손목과 자신의 손목을 수갑으로 연결하고 그녀의 옆에 앉아 담담히 죽음을 기다립니다. 이 영화가 놀라운 것은 이 라스트신에 있습니다.

죽음이 서서히 다가오는 순간 악어는 삶의 욕망을 느낍니다. 수갑으로 연결된 그녀는 이미 죽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문득 자신만은 살고 싶어집니다. 기를 쓰고 수갑을 풀어보려고 노력하지만 이미 잠겨진 수갑은 풀어지지 않는다. 열쇠마저 놓쳐버리고 말았을 때, 결국 그는 손을 잘라서라도 살아보겠다고 손목에 칼을 들이댑니다. 하지만  끝내 그럴 자신마저 없는 악어는 서서히 그녀의 옆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를 구하려하고, 그러다 삶의 욕망을 느끼고 다시 좌절하는 물속에서의 그 과정이 드러난 라스트신을 조재현은 표정 하나로 연기해내고 있었다. 한강 물 속에서 죽어 있는 여인과 수갑으로 손이 묶인채 두려워하며 서서히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은 내게 전율처럼 다가왔습니다.

2. 짝사랑

[악어] 를 처음 보았던 그 무렵, 나는 한 여학생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내 모든 것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은 나 혼자만의 사랑이었습니다. 내 간절한 사랑을 그 여학생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사랑을 거절당한 나는 좌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학교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시험을 포기했습니다. 내 인생에서 정말로 소중하다고 생각한 사랑을 잃었는데, 학교에서 공부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그런 일들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채 하루 종일 영화만 보고 살았습니다. 하루에 서너편씩의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에 빠져있는 그 시간 만큼은 아무도 나를 방해할 수 없었고, 나는 영화속에서 또다른 내가 되어 현실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폐인같은 생활이 계속되다가 끝내 건강마저 잃었습니다. 병원에 다니게 되고, 약의 부작용으로 정상적인 삶이 힘들정도의 상황으로 빠져들어야했습니다.


3. 나는 정말 사랑했을까?

[악어]에서 악어가 여자를 사랑했던건 진짜 사랑이었을까요? 처음에 여자를 만났을때 악어는 그녀에게서 단지 성적인 욕구를 느꼈을 뿐입니다. 그에게 있어 여자는 본래의 인간으로서 존중할 대상이 전혀 아니었고, 단지 그의 성적 욕망을 해소하는 도구로서 사용되어질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여자의 과거를 알게되고 그녀를 연민합니다. 그 연민을 그는 사랑으로 받아들였고 여자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게 됩니다. 하지만 여자에게는 오직 약혼자만 있었습니다. 악어는 약혼자의 야비한 배신을 여자에게 알려주었고, 여자는 처음으로 악어에게 마음을 연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약혼자의 배신을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결국 다시한번 자살을 택하게 되고 여자를 구하려던 악어는 다시 살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됩니다.

그 시절 나는 정말 그 여학생을 사랑했던걸까요?  대학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스무살 스물 한살 시절, 남들처럼 멋진 연애도 해보고 싶었고, 고등학교 시절에 TV 속 캠퍼스 드라마에서 보았던 것처럼 캠퍼스 커플이 되어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여학생을 알게 되었죠. 마침 그 여학생은 내 마음을 충족시켜줄 만큼 예쁜 외모를 지니고 있었고, 나는 그 여학생을 사랑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머리 속으로 혼자만의 사랑을 싹티워가기 시작한겁니다. 그녀의 마음과 상관없이 나는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혼자만의 마음으로는 도저히 내 마음을 충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다른 문제로 무척 힘들던 무렵에 그녀의 상황과 상관없이 다짜고짜 내 마음을 고백하고는 보기좋게 거절당했습니다. 그리고 상처받았습니다. 내가 상처받았던 것은, 좌절해서 방황했던 것은 무엇때문이었을까요? 그녀를 잃어서일까요?

애초에 그녀가 날 사랑한 것도 아니었으니 그녀를 잃었다고 볼 것도 없습니다. 그녀를 사랑하고 함께하고 싶은 내 욕망이 충족되지 못한 그 상황이 견디기 싫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 무렵 그 여학생보다 더 예쁘고 내 마음을 혹하게 만들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더라면, 아니 그 여학생의 문제에 신경쓸지도 못할 만큼 어렵고 힘든 다른 상황들이 내게 있었더라면 그래도 나는 그 여학생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4. 사랑이라는 이름의 욕망

김기덕의 [악어]는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감독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사실은 단지 욕망일 뿐이라고 비웃는듯 합니다.

약혼자를 사랑한 여자는 결국 약혼자에게 배신을 당했고, 그 사실 하나로 자살을 택합니다. 그녀를 이용할줄만 알던 악어는 여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여자의 마음속에 자신이 들어가기 위해서 약혼자의 배신을 그녀에게 알려줌으로서 여자의 자살을 조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그는 삶의 욕망을 느끼고, 자신의 손목을 잘라서라도 여자를 버리고 혼자 살려고 하는겁니다.

욕망이란 무엇인가요? 심리학자 자크 라캉은 욕망에 대하여 일컫기를 욕망은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고, 얻으려는 욕망은 그것을 손에 넣은 순간 저만큼 물러난다고 했습니다. 그는 욕망을 몇가지의 단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처음 상상계의 단계에서는 대상이 실재(實在)처럼 보이지만, 대상을 얻는 순간 상징계로 넘어가면서 허상이 되기 때문에, 마지막 실재계에는 욕망만 남고 인간은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이며,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그 여학생을 사랑했던 것은 그녀를 욕망했다고 볼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상상계 속에서 그녀를 사랑한다고 믿었고 그 욕망은 성취되지 못하였습니다. 상상계를 넘어 상징계로 들어섰을때, 그 욕망을 성취하게 되었을때는 그럼 정말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영화 [악어] 속의 여자는 약혼자를 사랑했지만 그녀가 만난 것은 약혼자의 추악함이었습니다. 악어는 여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랑은 삶에 대한 욕구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욕망이 성취되는 상징계를 넘어서게 되면 이윽고 욕망의 허상을 알게되고 다른 욕망의 대상을 찾아가게 되는 실재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5. 사랑을 꿈꾸다
 
욕망은 사랑이라는 포장을 입고 우리를 찾아옵니다. 매우 달콤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욕망은 지금도 많은 젊음에게 설레임이라는 감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알록달록한 포장지를 한 꺼풀만 벗겨내보면 이내 그 안에 감추어진 진실을 보게 됩니다. 욕심, 사랑이라는 그럴듯한 포장 안에서 결국 나의 허상을 이루기 위한 욕망만이 숨쉬고 있음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사랑하는 일이, 사랑 받는 일이 참 두렵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욕망하게 될까봐, 누군가의 욕망에 휘둘려질까봐 두렵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었는데 결국에 어느 날엔가 그 사랑이 단지 욕망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그럼에도 사랑을 꿈꾸고 또 사랑을 기대합니다. 설령 그 사랑마저 어느날엔가 욕망이라는 정체를 드러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또 사랑하고 꿈을 꿉니다. 왜냐면 내 가슴은, 사랑을 담는 내 가슴은 아직 진정한 사랑을 품을 줄도 모르지만,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참 사랑을 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기 때문입니다. 그 참 사랑, 욕망이 아닌 진정한 사랑,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결국에는 생명까지 내어주는 참 넓고 큰 가슴의 사랑을 보여준 이가 있었음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느날엔가는 이 좁다란 가슴도 조금씩 그 넓은 가슴을 닮아가리라 꿈을 꿉니다.


'이야기가 숨쉬는 책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상애 - 구운몽 옥루몽 게임  (2) 2009.05.12
사랑이 없이는 혁명도 없다.  (0) 2009.05.08
여행에서 길을 잃다.  (4) 2009.04.29
이야기 중독  (6) 2009.04.28
거인과 마주서서  (0) 2009.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