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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숨쉬는 책장

옥루몽 소회


'화설 옥경 십이루에 그 하나는 가로되 백옥루니, 제도가 굉걸하고 경개 통창하여 서쪽으로 도솔궁을 이웃하고, 동으로 광한전을 바라보니, 옥창주호에 서기 어리었고 취와홍영이 벽공에 솟았으니, 상청수관 중 제일이라. 옥제 일찍 옥루를 중수하시고 모든 선관 데리고 큰 잔치로 낙성하실새, 난성 봉관에 요랑하며 우의예상은 풍편에 표요하니 옥제 파리배에 유하주를 부어 특별히 문창성군을 주시며 백옥루 시를 지으라 하시니, 문창이 취흥을 띠어 수불정필하고 삼장 시를 아뢰니,...'

 

오랫만에 옥루몽을 들쳐보았습니다. 대학시절 고전소설강독 수업에서 가장 넘기 힘들었던 산이던 책입니다.

대학 3학년에 복학하기 전 이야기꾼은 무척이나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건강 문제로 수업을 전혀 들을 수 없었던 2학년 시절이 몇 해나 지난 후였지만, 여전히 내가 정상적으로 수업을 들을 수 있으리라 자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리저리 미리미리 3학년 수업정보들을 미리 복학한 친구들로부터 전해 듣다가 만나게 된 것이 남영로의 '옥루몽'이었습니다. 고전소설강독 클래스가 어렵다더라... 매 시간 소설을 한 권씩 혹은 몇 권씩 독파해야 하는데 한학기에 수십개의 작품을 읽고 분석해야 한다더라... 그중 가장 어려운게 '옥루몽'인데, 분량도 엄청날 뿐더러 문체의 어려움은 가히 가독성을 떨어트리더라... 친구들 마다 이런 저런 반 협박성 이야기들을 전해주며 복학해서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방학때라도 미리 미리 읽어두어야 한다며 겁을 주었습니다. 결국 그 협박에 넘어가 전 학기 수업을 먼저 들었던 동기 녀석에게서 제본한 책을 빌려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수업에서 사용하는 소설들은 시중에 출판되지 않은것들도 많은지라 A4크기의 두꺼운 책 세 권 분량으로 제본해서 보았습니다. 그 세 권 중 가장 두꺼운 책이 2권이었는데 이 2권 안에 '옥루몽'이 있었습니다. 여러 소설들이 함께 모여 있는 1권과 3권에 비해, 이 2권 안에는 오직 '구운몽'과 '옥루몽' 단 두편만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구운몽...그렇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 나로 하여금 문학의 세계에, 그것도 고전문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만들었던 몇 안되는 작품들 중에서도 내 기억 속에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작품이 바로 '구운몽'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소화해 내기엔 다소 어렵기도 했지만 그 분량 역시도 워낙 방대한지라 무척이나 나를 괴롭혔던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옥루몽'은 대충 어림하기로도 구운몽보다 10배 정도는 많은 분량으로 제본 2권의 상당량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그 분량으로 기를 폭삭 가라앉히더니 옥루몽 권지일 도입부분을 읽기 시작하려는데 '화설 옥경 십이루에 그 하나는 가로되' 로 시작되는 첫 줄 부터가 도대체 읽혀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나름 어린시절부터 고전소설 꽤나 읽어왔다고 자부해왔고, 어려운 한자체의 문장이나, 작품들 속에서 인용되는 중국 고사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해 오던 내가 한 줄 읽고 다음 줄 읽으면 그 이전 줄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 지독한 난독증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어차피 남는 것이라곤 시간 뿐이던 3학년 복학직전의 겨울방학, 학교 앞에 얻은 자취방 구석에 쳐박혀서 한 장 한 장 아니 한 줄 한줄 험준한 고봉을 오르는 심정으로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한장을 읽는데만도 한시간은 족히 걸리더니 삼사일이 지나고서는 그래도 한 줄 읽고 한 줄 잊어버리는 난독증 증상이 조금은 나이지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밥 먹고 화장실 가는 것 외에는 하루 종일 이 책만 붙들고 지낸지 일주일째부터는 이 소설이 무척 재미있어지기 시작하더군요. 한 장 한 장의 내용이 끝날때마다 '차청하회하라' '하회를 보라' '하회를 석람하라'는 식으로 다음 내용의 궁금증을 북돋는 작가의 짓궂음에 치를 떨어야 했습니다. 정말로 그 다음 장의 내용이 궁금하여 미칠것만 같아서 나중엔 밥 먹는 것도, 잠 자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읽어나가는 권 수가 늘어나면서 이젠 수업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소설 내용 속에 빠져들어서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소설 속 세계에 빠져들어 양창곡이 되었다가 강남홍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수련한 문장가로 아름다운 한시를 지었다가 전쟁에서 적을 조롱하며 격파하는 장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엔 눈을 감으면 소설 속 장면들이 하나 하나 영화 화면처럼 떠올라서 뇌리에서 잊혀지지를 않았습니다.


그 뒤로 학교에 복학하고 보내었던 3학년 시절, 기독학생연합회 회장으로 CCC 활동으로 교회 청년부 회장으로 이런 저런 일들로 정신 없던 그 시절에 그래도 내가 처음으로 전공수업에 재미를 둘 수 있게 된 것이 1학기 '고전소설강독' 수업이었고, 지쳐 서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았던 2학기 시절에도, 학기 내내 친구들과 함께 옥루몽을 컴퓨터 게임으로 만드는 게임 기획안이던 '천상애(天上愛) 게임'에 매달려 지내기도 했고, 또 온오프라인에서 활발하게 진행되던 수업 발제와 토론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더랬습니다.


그  뒤로 몇 해가 더 흘렀지만 여전히 이 책을 다시 펼쳐보아도 옥루몽은 재미있습니다. 시애틀에 있던 시절 '옥루몽'을 가져가지 못했던 아쉬움에 떨었었고 여전히 문득 문득 떠오를때마다 한번씩 펼쳐보면서 다시 그 세계로 빠져들게 됩니다.

 

이 '옥루몽'이 새롭게 완역되어 출판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반가운 일입니다. 중고등학교시절 구운몽에 대하여 배우며 그 밑에 한 줄로 남영로의 '옥루몽'을 설명하여 이르기를 '구운몽'의 아류작이라고 하였습니다. 원작보다 더 방대하고 심오하며 내용면에서 발전되어 있는 아류작도 있는 것일까요?

아직 옥루몽을 접해보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꼭 한번 도전해보라 권하고 싶습니다. 저는 현대어로 완역되지 않았던 책을 읽느라 시간도 오래걸리고 읽기도 힘들었지만 이제 읽기 좋은 완역본이 나왔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한국 고전문학의 집대성, 보고가 바로 이 '옥루몽'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소설이 다 믿을 것은 아니로되, 허탄하고 허사라도 꿈을 보면 실상이 있는 책이 다른 소설과 다르니, 순전 허황한 데로 돌려보고 보내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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