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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숨쉬는 책장

이야기 중독


나는 이야기 중독입니다. 책을 읽을 때에도, 영화를 볼 때에도,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볼 때도 나는 늘 그 모든 것들에서 이야기를 뽑아내려합니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 속에서 어느집 간판에서도 나는 늘 새로운 이야기를 읽곤 합니다.

생각해 보면 어린시절부터 였습니다.
사랑이 뭔지조차 제대로 모르던 꼬마 시절에 테오토르 쉬토름의 소설 '호수'를 읽었습니다. 첫사랑의 아픈 기억과 한 남자의 일생이 그 어린 나이에도 너무나 가슴에 남아서 읽고 또 읽고 하다가 내용을 모조리 외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학교 운동장 한 귀퉁이에서 친구들을 모아놓고 이 소설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침을 튀기며 구연하던 그 저녁 무렵에 이미 나는 이야기와 설레이는 만남을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막연히 사랑을 동경하며 열병을 앓던 사춘기 중학생 시절에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을 읽었습니다.  여주인공 알리사가 죽은 다음에 남자 주인공 제롬이 알리사가 남긴 일기장을 읽는 장면에서 그 몇 페이지 되지 않는 글들이 너무나 사무치도록 아파서 며칠을 앓아 누웠습니다. 명치 끝이 아리고 또 아파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남몰래 한참을 울던 그 늦은 밤에 이미 난 이야기에 반해버린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수학문제 하나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는 것 보다는 에릭 시걸의 소설 한권이 더 소중했습니다. 몇몇 작가들의 책들은 헌책방을 뒤져가며 찾아다니고, 그 작가의 신작이 출판된다는 광고만 보면 채 서점에 출시되기도 전에 며칠전부터 서점 주인을 닥달해가면서 죽치고 앉아 있었습니다. 기말 고사 전날에도 읽고 싶은 책 때문에 두시간을 차 타고 서점에 나가 책을 사서는 다시 두시간을 차 타고 돌아와 밤새워 그 책을 다 읽어 버렸던 그 새벽에 이미 난 이야기와 사랑에 빠져버린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 일학년 시절 학교 앞 자취방에서 흐린 스탠드 불을 켜 놓고  밤을 세워가며 체임 포톡의 '탈무드의 아들'이나 도몬 후유지의 '불씨' 같은 이야기들을 읽곤 했습니다. 학과 공부는 제대로 않하는 주제에 도서관에는 자주 간다는 사실이 남들 보기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혹시 누가 볼까 무서워 비교적 인적이 드문 사회과학서적 책장 뒤로 숨어들곤 했습니다. 바닥에 주저 앉은채로 인문학 서적들을 잔뜩 쌓아놓고는 몇시간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나 황석영의 소설 같은 책들을 어줍잖게 들춰보기도 했습니다. 그 도서관 바닥의 차가운 냉기를 느끼며 책장을 뒤적이던 날들 속에서 이미 이야기에 중독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으로 습작이라는걸 시작했던 중학교 시절 대학노트 한권을 옆구리에 끼고서는 유치한 시 습작을 끄적거리거나
알퐁스 도데의 '별'같은 소설들의 뒷이야기를 이어 쓰고는 했습니다. 이런 내용 저런 내용으로 몇번이고 쓰고 또 쓰고는 했습니다. 스테파네트 아가씨와 목동의 사랑을 이어주기도 했고 때론 목동의 비참한 죽음으로 결말을 맺기도 했었습니다.

가수들을 좋아하던 누나가 사오던 음반들을 들으면서 한 음반 전체에 담겨있던 열몇개의 노래들의 가사를 읽고 또 읽으며 그 내용들에 담겨진 줄간의 서사를 상상하며 그 노래들 전부를 잇는 서사를 그려보곤 했습니다.

따분한 수업시간에 늘 선생님 몰래 연습장에다 사람의 이름과 화살표 동그라미등으로 이루어진,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이야기 콘티들을 짜곤 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이가 들어서까지 그 버릇 못버리더군요. 길을 걸을 때에도, 잠자리에 들기위해 침대에 누웠을 때에도 머리 속엔 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비록 제대로된 습작한번 해보지 못하는 요즘이지만 머리 속엔 늘 수많은 이야기들이 생겨나고 사라집니다. 미친듯이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소설을 읽지 못하고, 영화도 보지 못하고, 그 어떤 이야기도 접하지 못하는때에는 참을 수 없는 갈증마저 느끼곤 합니다. 그럴때에는 머리 속으로 오래전에 읽었던 혹은 보았던 소설과 영화들을 되새겨보면서 "아 그 장면에서 그 인물들이 느꼈던 감정이 어떤 것이었고 어떻게 이야기가 흘렀던"가 떠올려보고 이전에 미쳐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혼자 좋아합니다. 때론 전혀 엉뚱한 곳에서 새로운 이야기 하나를 만들어서 한참을 공상하다가 그 이야기 내용에 빠져버려 혼자 아파하며 앓아눕습니다.

어찌보면 참 할일 없다 할 수 도 있고 머리 속에 쓸모없는 공상과 망상만 가득찼다고 할 수 도 있지만

여전히 나늘 늘 이야기에 목마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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