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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숨쉬는 책장

열정이 머문 시간


몇해 전 아끼는 후배와 영화 한 편을 같이 본 적이 있습니다. 졸업 이후에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나아갈 바를 늘 고민하고 한 걸음씩 나가려는 열정적인 후배이죠. 당시에는 저 역시 대학 졸업후 오랫동안 준비했던 유학이 비자문제로 좌절되었던 때였고 후배 역시도 꿈꾸던 대학원 입시에서 실패를 맛보았던 시기였습니다. 아직은 젊은 날들이어서 가슴 속에 뜨거운 꿈을 품고 있지만, 아직은 어린 날들이어서 그 꿈들이 그 뜨거운 열정이 제자리에 머물러버린 시간이었습니다.
 
그 때 보았던 영화가 '비상'이었습니다. 몇 해 전에 다큐멘터리 영화로서는, 그리고 축구 다큐멘터리로서는 드물게 흥행에서도 성공한 영화였지요. 우리가 영화를 보았던 때는 이미 대부분의 극장가에서 영화를 내리고 있던 끝물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 '비상'은 머물러 버린 시간 속에서 열정을 식어버리던 우리들에게 자그마한 위로와 힘을 주는 영화였습니다.

창단 2년만에 K 리그 준우승을 이루어내었던 인천 Utd의 기적같은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풀어낸 작품이지요..

창단 첫해에 참혹하기만 했던 성적, 기대를 모았던 명장 감독이 사퇴하고 뒤를 이은 것은 이름 없는 수석 코치였습니다. 스타 플레이어도 별로 없고 다른 팀에 비해 현저히 적은 숫자로 선수들을 쉴수 있게 해주지도 못하는 스쿼드, 연습구장도 없어서 세시간 연습을 위해 다섯시간을 버스로 이동해야 하는 형편이었지요. 시민이 주주가 되어 만든 신생 시민 구단으로서, 창단 두번째 시즌만에 이루어낸 인천 Utd의 성적은 이런 어려운 형편들로 인해서 더 영화 같고 빛이 나는 일이었습니다.

약소한 팀이 강팀들을 상대로 승리를 일구어내는 일, 숱한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들이고 또 실제로 그런 일들이 드물기는 하지만 일어나곤 하는 축구 세상에서 가끔씩 청량제 같은 역할을 해주지요..야기꾼은 성격 탓인지 맨체스터 Utd니 첼시니 레알이니 하는 소위 강팀들보다는 약소팀에게 더 정이 갑니다.

이전에 맨유, 리버풀 등과 함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호령하던 강팀 중 하나였다가 지금은 옛 명성을 잃어버리고 잉글랜드 축구 3부 리그격인 리그1에서 허덕이고 있는 리즈 Utd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잉글랜드 축구팀이지요. 한 시즌 뿐이었지만 인천 Utd와 비슷하게 한때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에서 무패행진을 벌였고 결국 리그 준우승까지 차지했던 레알 소시에다드 같은 팀도 참 좋아했고요.

 끊임없이 스페인으로부터 분리독립 운동을 벌였던 바스크 지역의 상징 같은 팀이 레알 소시에다드이지요. 카탈루냐 지방을 대표하는 팀이 FC 바르샤인 것과 같은 맥락이지요. 물론 카탈루냐에게 있어서 바르샤는 유일무이한 상징과 같은 팀이지만 바스크에겐 소시에다드 말고도 '아슬레틱 빌바오'가 있기는 하지요. 그래도 빌바오가 UEFA 결승에 올랐던건 70년대 일이지만 그땐 제가 태어나던 무렵이라 최근에 활약을 보여준 소시에다드가 더 정이 가지요..

실제 이 팀들은 90년대까지 바스크 지방 출신이 아닌 선수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천수의 예에서 보듯이, 이제 그 문호를 개방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바스크 지역이 주도하는 순혈주의를 지키고 있지요. 바르샤의 카탈루냐나 빌바오와 소시에다드의 바스크, 오랜 세월을 두고 스페인의 파쇼정권과 맞서 독립을 위해 싸우는 그들의 열정이 좋아보였기에 소시에다드를, 빌바오를, 그리고 강팀이긴 하지만 바르샤를 좋아합니다.

 이 팀들은 스페인 프랑코 정권의 아래에서 폭정에 시달린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스페인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인물로 불과 32살의 나이로 장군이 되었던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정치에 투신하여 권력을 손에 잡게 되면서 스페인의 역사가 암울해집니다. 헤밍웨이의 유명한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배경이 되는 스페인 내전을 통해서 프랑코가 집권하게 되지요.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힘입어 스페인의 정권을 잡은 프랑코는 강력한 파시스트 독재정부를 구성하였고 자연스레 카탈루냐나 바스코 같은 지역들은 심각한 폭정에 허덕이게 되는 것이죠.

이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또 광적인 레알 마드리드의 팬이었습니다. 카스티야 우선의 정책을 펼치는 그는 이런저런 유치한 방법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라이벌 격인 FC 바르셀로나에 위해를 가하지요. 레알 마드리드가 스페인의 전통적인 강팀임에는 분명하지만 프랑코 정권 시기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일방적인 지원에 힘입은 바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결국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일방적인 카스티야 우선 정책,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의 편들기에 대한 반감이 카탈루냐 지방의 항거로 드러났고 그 항거의 상징적인 클럽이 바로 카탈루냐 지방의 대표 축구팀인 FC 바르셀로나와 그 축구경기장인  누캄프입니다.

지금도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FC의 경기는 '엘 클라시코 데르비'라고 하여 거의 전쟁과 맞먹는 라이벌 전입니다. 이 '엘 클라시코 데르비'에는 모든 스페인의 축구팬들을 너머서 전 세계의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팬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 넣는 특별한 힘이 있습니다.

이 '엘 클라시코 데르비'는 어쩌면 축구라기 보다는 또다른 전쟁터입니다. 바로 지배자의 땅인 카스티야에 대하여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피지배자의 땅 카탈루냐의 독립전쟁이지요. 

물론 이 '엘 클라시코 데르비'야 말로 카탈루냐인들의 분리독립 의지를 꺽으려는 스페인 정권의 책략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습니다. 누캄프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당당하게 대결하는 FC 바르셀로나에 열광함으로서 실제 삶에서의 저항의지를 한풀 꺾을 수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인지 실제로 레알 마드리드와 함께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를 호령하는 FC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보다는 훨씬 약소팀을 갖고 있는 아슬레틱 빌바오와 레알 소시에다드의 바스크가 무장 독립 투쟁이 훨씬 빈번하다고 하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엘 클라시코 데르비'는 전쟁이고 카탈루냐인들에게 FC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이 아닌 카탈루냐의 대표팀입니다. 그래서 FC 바르셀로나의 간판 스타였던 루이스 피구가 2000년 바르셀로나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료 5천610만달러 즉 한화로 541억을 받고 이적했을 때 FC 바르셀로나의 팬들로부터 엄청난 야유를 받게 되었던거죠. '엘 클라시코 데르비'때 마다 루이스 피구는 숱한 야유에 시달려야 했고, 심지어 살해 위협까지 받기도 했습니다. 사실 루이스 피구는 단지 하나의 프로 축구 선수였을 뿐이고 더구나 스페인의 정치 상황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포르투갈 국적이었음에도 말입니다. 비록 스페인 사람이 아니어도 FC 바르셀로나의 선수가 됨으로서, 때로는 그 팀의 팬이 됨으로서 카탈루냐 분리 독립 전쟁의 투사가 되기도 또 배신자가 되기도 할 수 있는 거지요.

그게 바로 축구의 문화이고 또 축구를 좋아하게 만드는 매력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단순한 이윤에 움직이는 프로 스포츠가 아니라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또 하나의 문화, 또 하나의 사회가 바로 축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근래들어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서 횡행하는 자본전쟁을 보노라면 한숨이 나옵니다.

살아가면서, 약자가 강자를 이기고, 개천에서 용나는 식의 이야기들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조금씩 배워갑니다. 가난이 대물림되고, 공정한 기회조차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어른이 되어가며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축구에 열광하는가 봅니다. 신생팀인 시민구단이 대기업이 주주가되어 스타들을 모아 만든 전통의 강호를 이길 수 있는, 이제 스페인의 한 지방으로만 알려진 카탈루냐와 바스크가, 자신들을 지배한 카스티야의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싸울 수 있는 것이 바로 축구이기에, 나는 문화로서의, 역사로서의 축구를 좋아합니다. 비록 자본이, 스타산업이 지배하고 있어도, 기적이 존재할 수 있는, 열정이 통할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공은 둥그니까요.

그 어떤 기적도 이유없이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찾아드는 기적이 있다면, 그 것은 기적이 아니라 정말 우연일 뿐입니다. 모든 기적에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그 이유가 숨어 있습니다. 숱한 실패 속에서 교훈을 배워가고, 패배와 실패가 주는 아픔을 알아갑니다. 넘어질 때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고, 기다림의 시간이 길수록 최후의 승리는 더 달콤한 법입니다.

다른 팀에서 쓸모 없다고 방출 되어 버렸던 기억들 뿐, 매스컴에서 한번 관심 가져주지도 않는 스타 플레이어 하나 없는 선수단, 감독대행이라는 꼬리표만을 단채 인정 한번 받아보지 못한 이름 없는 초짜감독, 한번도 이겨보지 못하고 계속 되던 오랜 패배의 쓴 맛이 있었기에 그들의 승리가 값지고 달콤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본과 스타가 만들어낸 승리보다 약소팀이 일구어내는 승리가 기적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열정과 실패의 아픔이 가져다주는 뜨거움이 바로 그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몇 해전의 후배나 야기꾼이나 둘 다 아직은 삶의 여백이 많이 남아 있는 나이였습니다. 아니 몇 해가 흐른 지금도 여전히 많은 여백을 비워두고 있습니다. 아직은 그리고 싶은 삶의 밑그림을 그려가기 시작하는 나이라서인지, 이런 기적을 만들어내는 모습, 그 기적을 일구어가는 열정과 뜨거움을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열정과 뜨거움은, 쉽사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부터 열정과 뜨거움을 품자고 생각하고 얻는 것이 아닙니다. 숱한 실패와 기다림 속에서 얻어가는 것입니다. 때로 삶 속에서 어려움의 시기도, 기다림의 시기도 찾아올 수 있고 또 그 시기들이 생각보다 더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품은 열정이, 뜨거움이 이 시간 속에 그대로 사그러들지 않고 여전히 우리 심장 속에서 뜨거운 피로 솟아날 수 있다면 이 어려움과 기다림의 시간들이 결코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음을 생각합니다.

이 어려움과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 볼 수 있기에, 우리가 꾸는 꿈의 소중함을 더욱 느낄 수 있습니다. 아무 어려움 없이 얻게되는 승리는 치트키로 클리어한 게임처럼 쉽사리 식상해지는 법입니다.

 

레알 소시에다드의 기적은 단 한시즌 만의 일이었습니다. 인천 유나이티드의 비상도 단 한시즌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기적이 주는 힘은 단지 한 시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강자가,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도 열정과 뜨거움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적이 존재함을 보여주었다는 것만으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 기적을 일구어낸 선수와 감독 그리고 팀의 구성원들 모두의 가슴 속에, 그 기적의 모습을 함께한 팬들의 가슴 속에 그리고 지금 어려움과 기다림의 시간 속에 잠시 숨고르고 있는 우리의 가슴 속에도 열정과 뜨거움을 불러 일으킬 수 있기에 충분히 그 승리는 한 시즌 이상의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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